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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 연혁 / 지역 특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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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 연혁 / 지역 특성

chihoon, An. (A.K.A 슈퍼스타) x2chi 2008.10.18 18:02

슈퍼스타 후니훈 - 리출신 안치훈의 고향,,,,ㅋㅋ 
"기응상븍또 안덩씨 픙천미언 갈쩐이뤼 삼칠 쌈번쥐"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갈전 2리 373 번지"


안동시 풍천면 사진으로 더보기..(병상서원/하회마을) ▼

 구석구석 병산서원1 => http://touralbum.tistory.com/298
 구석구석 병산서원2 => http://touralbum.tistory.com/299
 구석구석 하회마을1 => http://touralbum.tistory.com/300
 구석구석 하회마을2 => http://touralbum.tistory.com/301



연 혁

  • 삼국시대 - 하지현(下枝縣)
  • 고려시대 - 풍산현(豊山縣)
  • 조선시대 - 풍남면(豊南面), 풍서면(豊西面)
  • 1934. 4. 1. - 풍천면(豊川面)으로 행정구역 개편
  • 1976. 7. 1. - 어담출장소(魚潭出張所) 설치 (5個里)
  • 1995. 1. 1. - 안동시 풍천면(安東市 豊川面)

지역특성

  • 풍천면은 지역적으로 안동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천,의성과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강이 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특히 하회마을, 병산서원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어느곳보다 문화에 대한 보존의지가 강하여 어느곳 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을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의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 또한, 참외, 메론, 수박, 곶감, 마등 특산물을 생산 전국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판매실적 또한 매번 늘고 있는 상태이다.

 

광덕리(廣德里)
광덕리는 하회마을과 화천(花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하회마을을 완전히 휘감아 돈 후 화천서원 앞에서 다시 방향을 틀어 광덕리를 감아 돌아 완연한 산태극?수태극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의 흐름에 의하여 형성된 퇴적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광덕리의 대부분이 표고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광덕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심동, 형호, 하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덕리라 하였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고 1995년 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천면으로 바뀌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덕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1리가 121가구에 321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2리에는 102가구에 294명의 주민이 등록되어 전체 가구수는 223가구에 61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비교적 큰 동네이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솔안, 저우리 2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2리에는 앞개, 광디이, 건잣, 안심이, 심못골, 섬마, 솔미 등의 7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구담리(九潭里)
구담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에 있은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예천군 용궁면 신상면 암천리의 일부와 예천군 호명면 금릉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구담동이라 하였으며 1934년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에는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구담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규모는 1리가 125가구에 35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2리에는 198가구에 559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풍천면에서 가장 큰 생활중심지이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뒤지골, 안골, 거무개 등 3개가 있고 2리에 섬마?시장 등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을 아홉 구(九) 자에 깊을 담(潭) 자를 쓴 것만 보아도 언뜻 추상이 되듯이 이 지역에는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생긴 아홉 개의 깊은 소(沼)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구담리는 순천 김씨와 광산 김씨들이 집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으로 마을이 작고 형세가 볼품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이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이 마을에는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없는 마음씨 착한 노인이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농사 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 머슴으로 근근히 삶을 꾸려 나갔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닥쳐 그 해 농사는 이미 수확할 곡물이 없어 망치게 되어 모든 마을 사람들이 가뭄이 들어도 논에 물을 풀 수 있는 우물을 파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장소 일곱 곳을 정하여 파내려 갔지만 어느 곳에서도 물은 솟지 않고 오히려 웅덩이를 파다가 그만 착한 아들이 흙더미에 깔려 압사하는 큰 사고가 났다고 한다. 이에 모든 마을사람들은 실망하여 일손을 놓았으나 노인은 홀로 여덟 번째 웅덩이를 혼자 힘으로 파내려 갔으나 이곳 또한 물이 나지는 않았다. 노인은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데 홀연히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뒷산 고목나무 옆에서 100보 떨어진 곳에 웅덩이를 파보아라'하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깬 노인은 너무나 생시 같아 산신령이 가리켜준 곳을 파니 놀랍게도 굵은 물줄기가 솟아 못을 이루고 가뭄을 면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 못이 남아 있으며 못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하여 구담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오늘날에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말미암아 예전의 소는 찾을 길이 없지만 자연습지가 만들어져서 희귀 동?식물이 자라는 생태계의 보고로 많은 관심을 불러오고 있다

구호리(九湖里)
풍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구호리는 의성군 신평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지형은 대부분 비교적 높은 봉화산과 오선당의 지맥에 의해 형성된 산지에 속하며 을곡천(乙曲川)이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다. 마을의 역사는 본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어 구미리라 하였고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예천군 용궁면 신하면의 상안한리를 병합하여 구호리라 하였으며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다. 지명을 구호라 부른 것은 마을을 관통하는 을곡천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고 처음에는 '굽이'라 불렀는데 음이 변하여 구미 또는 구미촌이라 하였다. 또는 구호리의 남쪽 산등성이가 마치 늙은 거북의 등과 같다 하여 거북 구 자에 늙을 노 자를 써서 구노(龜老)동이라고도 하였으며 그 끝 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구미?귀미라 불렀다. 그후 마을 사람들이 의성 청계에서 풍천면(豊川面) 신성동(申城洞)까지 흐르는 을곡천이 구호동을 지나 아홉 구비를 돌아 흐른다 해서 구곡(九谷)이라 하였는데 이 을곡천이 흐르며 각 구비마다 깊고 푸른 소(沼)를 만들어 구호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양지마와 음지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51가구에 141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금계리(錦溪里)
풍천면 광덕리에서 신립광산으로 통하는 지방도를 따라 재를 넘어 마늘봉의 남사면에 자리잡은 마을이 금계리이다. 이 길은 어담리와 인금리로 통하고 일직면과 의성으로 연결되는 지방도이다. 금계리도 역시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을 병합하여 금계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은 마을을 굽어 흐르는 계곡이 마치 비단과 같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자연마을 현황은 신기, 탑마, 굽리, 고사 등 4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86가구에 209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비교적 작은 마을이다.

기산리(箕山里)
구담리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구담교를 건너 넓게 펼쳐진 들에 형성된 마을이다. 기산리는 낙동강에 의하여 형성된 퇴적지와 강변의 기름진 땅으로 인하여 풍천면에서도 넓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다. 낙동강의 남쪽에 자리잡아 마을의 북쪽이 넓은 평야지역이고 남쪽이 산간지역에 속한다. 기산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성동과 안심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기산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기산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215가구에 60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큰 동리이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샘골, 뒷골, 섬마 등 3개이고 2리에는 난대골, 아랫골, 샛골, 섬마 등 4개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지명은 마을 뒷산이 마치 곡식을 까부는데 사용하는 도구의 하나인 키이(箕)를 쏙 빼어 닮았다고 해서 기산이라 하였다.

도양리(道陽里)
본래 풍산면 지역으로 양지쪽이 되므로 되양골 또는 도양골이라 하였는데 중종(中宗) 때 관찰사(觀察使) 김연(金緣)이 살면서 도왕동으로 고쳤으며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자방동, 상좌동, 구담동의 각 일부와 예천군 위라면의 산합동 일부를 병합하여 도양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 풍천면으로 바뀌었다. 행정구역은 도양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263가구에 731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비교적 큰 동리이다. 자연마을의 현황은 1리에 상좌섬, 샛터, 재피골, 자방실, 삼거리 등이 있고 2리에는 원도양, 마봉, 덕고개, 움골, 참산내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산리(屛山里)
풍천면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마을로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풍산현의 상리와 하리의 일부, 풍서면의 가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병산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산리의 규모는 47가구에 10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은 원병산, 정자골, 효부골 등 3개이다. 지명은 병산서원 앞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병산에서 따온 것이다.

신성리(申城里)
풍천면 신성리는 풍산홍씨의 세거지였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가고 광산김씨가 들어와 살고 있는 마을이다. 신성리를 찾아가는 길은 풍천면 구담리에서 927번 지방도를 따라 의성군 신평면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구담리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구담교를 지나면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는 신성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들판을 가로질러 길이 끝날 즈음에 신성리 아랫말에 도착한다. 이곳까지는 길이 곧게 뻗어있으나 지금부터는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아랫말 앞에는 '신성리선돌' 유적이 논 가운데 있다. 신성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산동 일부와 용궁군 신하면의 하안한리를 병합하여 신성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풍천면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신성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으며 169가구에 50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큰마, 탑마, 골안, 중마, 새터 등이고 2리에는 장골, 대방골, 아랫마, 비리끝 등이다. 지명은 동네의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그 한복판에 열십(十)자로 큰 길이 나 있어 그 모양이 아홉 번째 간지인 원숭이를 뜻하는 납 신(申) 자(字)와 같이 생겼기에 납성계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신성리(申城里)가 되었다.

어담리(漁潭里)
어담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개동과 일직면의 거물억리, 국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어담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의해 안동시 풍천면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어담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40가구에 372명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샛터, 원어담, 조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리에는 승통골, 자개동, 거물억, 개간지 등 4개이다. 지명은 이 지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자라형국에 속하여 못이 있어야 마을이 흥한다고 해서 어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금리(仁今里)
인금리는 풍천면 하회리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마을이다. 그렇지만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서 이 마을에 가려면 풍천면 광덕리를 거쳐서 겸암정사와 상봉정을 지나 신성광산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를 따라 재를 넘어 약 25km를 우회하여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한다. 불편함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올라 정상에 서보면 주변경관이 한 눈에 내려다보여 이곳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은 또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준다. 이 고개를 넘으면 금계리와 어담리로 연결된다. 어담을 막 지나면 인금리와 일직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인금리로 다가갈 수 있다. 최근 이곳에 평해황씨 문중에서 만휴당(晩休堂) 황귀성(黃貴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임란섬무원종공신황장군의적비(壬亂宣武原從功臣黃將軍懿績碑)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상이금실과 하이금실을 지나 포장도로를 달리면 낙동강과 마주하는데 강 건너 병산서원이 저만치 떨어져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강과 나란히 이어진 길을 달리며 강 건너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花山)의 경치를 보는 것 또한 색다른 감흥을 준다. 인금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애동을 병합하여 인금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의해 안동시 풍천면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인금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80가구에 20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상인금, 하인금 2개이고 2리에 월애가 있다.

하회리(河回里)
하회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으며 그후 193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의해 안동시 풍천면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물도리동이라고도 부른다. 산은 물을 얼싸안고 물은 산을 휘감아 돌아 산태극?수태극의 절묘한 지형을 빚어냈다. 풍수지리로는 마을의 생긴 모양이 물위에 활짝 핀 연꽃과 같다고 하여 연화부수형이라 하며, 짐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려고 하는 행주형이라고도 하고, 다리미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다리미형이라고도 하는 길지이다. 태백산맥 줄기의 하나인 일월산의 지맥이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낙동강과 만나면서 머물러버린 곳에 하회의 주산인 화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화산의 기운이 나지막한 능선을 이루며 뻗어 내린 곳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천하제일의 길지로 손꼽을 만큼 이름난 명당이다. 빼어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춘 하회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를 밝혀줄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지만 마을에서 구전되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과 하회탈의 제작에 얽혀있는 허도령의 애뜻한 전설로 미루어 대개 고려시대 초기로 알려져 있다. 초기 마을의 형성은 가장 먼저 입촌하여 터를 잡은 허씨들에 의해서이다. 허씨들은 화산자락의 따뜻하고 양지바른 거먹실골에 자리잡았으며, 그 뒤를 이은 안씨는 향교가 있었다고 전하는 향교골에서 모듬살이를 영위하게 된다. 현재와 같은 하회마을의 모습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풍산류씨 공조전서 류종혜 공이 풍산 상리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이다. 마을의 구성은 화산의 얕은 능선을 따라서 길이 나고 그 길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진다. 이 마을의 건축물들은 능선과 길을 등으로 하고 밖으로 향하여 지었기 때문에 동?서?남?북향의 모든 좌향이 나타나는 특색을 보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좌향의 건물일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강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줄 뿐만 아니라 앞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강물이 흐르는 풍치를 즐기기 위함에서이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순응하여 그 속에 동화되고자 하는 선조들의 슬기로움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회마을은 고건축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만큼 조선시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살림집들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솟을대문을 세운 거대한 규모의 양진당, 충효당, 북촌댁, 주일재, 하동고택 등의 양반가옥인 기와집과 작은 규모에서부터 제법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서민가옥인 초가들이 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학문을 탐구하고 몸과 마음을 닦던 옥연정사, 빈연정사, 겸암정 등의 정사가 있으며 선현들을 제사하고 인재를 교육한 병산서원과 화천서당 등의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인물로는 류종혜 공이 입향한 이래 대유학자인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과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우신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 등 수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영남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속놀이에 있어서도 하회마을이 지닌 훌륭한 자연환경은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성한 감성을 기르게 하였다. 하회마을이 지켜온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양반들이 놀았던 선유줄불놀이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양반문화와 서민들의 문화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서민들에 의하여 연희되었다면 선유줄불놀이는 음력 7월 16일에 양반들에 의해서 놀이되었다. 이 놀이는 부용대에서 낙동강을 가로질러 만송정 솔숲까지 동앗줄을 걸고 그 줄에 수백 개의 뽕나무숯가루 봉지에 불을 붙이는 줄불과, 솟갑단에 불을 붙여 절벽 아래로 던지는 낙화, 달걀 껍질 속에 기름불을 켜서 강에 띄우는 달걀불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 강 위에는 배를 띄워 선비들이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부르며 풍류를 즐기던 놀이이다. 이와 같이 하회마을은 풍산류씨 동성마을로서 선조들의 생활문화가 잘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체가 조상들의 소중한 삶의 자취와 생활문화가 잘 간직되어 있어서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하회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 179가구에 42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하회와 돌고개인 2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2리에는 웃밀골, 아랫밀골, 목골, 서원마, 새동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회의 허씨 터전이란 말의 유래

하회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별신굿 탈놀이에 사용되었다는 목조가면이 전한다. 이 탈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가면(木造假面)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때의 것이다. 지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이 탈에 대한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옛날 하회마을 동사 앞마당에는 부락민 모두가 모여 앉아 재미나는 놀이를 만들고자 여러 가지 의논이 분분 하였다.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양반, 선비, 초랭이, 영감, 부네, 이매, 백정, 할미, 주지 그리고 소(牛) 등으로 우선 결정하였다. 이때 총각 하나가 "아닙니다요! 얼마 전 윗마을에 중이 나타나 각씨를 업고 도망갔다는데 기왕지사 삐뚤어진 양반사회를 풍자하기로 했다면 중과 각씨 마당도 집어넣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찬성했다.

온 마을 사람들은 놀이를 꾸미는데 신바람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놀이는 당시 철저한 신분과 계급속에서 하동(아랫것)들이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표현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을 신랄하게 조소(嘲笑)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 얼굴로 춤을 추게 되면 누가 어떤 역할을 하고 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됨으로 춤추는 자도 꺼리게 되고 보는 사람도 흥이 없을 것이므로 탈을 만들어 쓰기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번을 서고 있는 손재주 좋은 허도령에게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허도령은 극구 사양했으나 꿈에 마을 수호신으로부터 탈 제작의 계시(啓示)를 받고 나서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허도령은 가을이 깊어갈 무렵 하회마을 뒷산 수목이 울창하고 한적한 곳에 외인의 출입을 막는 금색을 친 다음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전심 전력을 다 하여 열 두개의 탈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허도령은 탈을 다 만들려면 석달은 넘어야 할 터이니 모든 정성을 다해 훌륭한 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허도령이 이처럼 탈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을 때 마을 처녀들 사이에는 허도령이 종종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허도령이 탈을 제작하는 모습은 마치 신선 같다느니 아니면 뛰어난 귀공자를 닮았다는 등 처녀들은 은근히 그를 사모(思慕)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사모의 정이 넘친 한 처녀가 밤중에 홀로 일어나 뒤편의 은행나무 앞에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하루 빨리 허도령이 탈 만들기를 끝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그러기를 석 달되던 어느 날 떠놓은 정화수 속에 허도령의 모습이 보였다. 만들어 놓은 탈과 함께 영롱하게 허도령의 얼굴이 비쳤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탈을 다 만든 것이로구나 생각하니 그 처녀는 허도령이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처녀는 그만 참지 못해 허도령의 처소를 찾아갔다. 고고한 달빛은 처녀의 가슴을 더욱 애타게 하고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허도령은 탈 제작에 여념이 없다.

마침 마지막 탈인 이매의 턱을 깎으려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은 과연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앉은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본 처녀는 연정을 누를 길 없어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도령님! 허도령님! 잠시 손을 멈추시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요. 네!" 허도령이 이매의 턱을 만들려다 말고 여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아니? 이 밤중에 웬 계집이? 밖에 뉘시오!" 하면서 안절부절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 졌는데 어쩐 일인가?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가 실족으로 벼랑 끝에 떨어져 그 또한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매탈>은 턱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하며 오늘날 하회탈춤에는 턱없는 이매가 등장하여 바보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보아 하회마을엔 오래전부터 허씨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래서 하회마을은 허써터전이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하회의 안씨 문전

옛날 하회마을 낙동강 강가 오막살이집에 안씨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지나던 중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한다. 찢어질 듯이 가난하여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해 딱한 처지이었으나 마음씨 착한 안씨 내외는 스님을 거절할 수가 없어 재워주기로 허락했다.

그렇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스님을 굶길 수는 없었다. 이들 부부는 저녁거리 때문에 온갖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천장 갓집 옆에 매어 달아둔 명년 봄에 농사지을 피 종자를 꺼내어 저녁을 장만해 대접했다. 스님이 주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근심이 역력하였다. "여보! 주인장, 보아하니 걱정이라도 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이십니까?"고 물었더니 안씨는 작년 봄에 친상(親喪)을 당했지만 가난 때문에 묘자리를 구하길 없어 여태까지 아버님의 유택(묘)을 마련해 드리지 못하여 불효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스님은 안씨의 착한 마음과 공손한 대접에 감동하여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날이 밝자 스님은 "주인장! 어젯밤 이 댁에서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내가 묘터 하나를 잡아 드리지요" 하면서 자기를 따라 나서라고 한다.

안씨와 스님은 하회의 동쪽 화산(花山) 근처 산중턱을 올랐다. 어느 곳을 택한 스님은 "이 자리가 명당이긴 하오만……." 하는 것이다. 사연인즉 여기에 묘(墓)를 드리면 3대 후에 정승(政丞)이 난다는 말을 했다. 너무나 어려운 가난 때문에 지친 안씨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3대 후에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다는 곳을 마다하고 스님에게 부탁하여 현실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묘자리를 찾아달라고 하여 그곳에다가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말았다.

그 자리는 당년에 피 천 석을 거둘 수 있다는 명당이었다. 그리고 나서 안씨는 스님이 시켜준 대로 곡식 종자를 열심히 구하여 이른봄 하회의 낙동강 가에 뿌렸다. 시절이 좋아 그해 가을에 뿌린 곡식을 천석이나 수확하게 되어 그는 당년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써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향언(鄕言)이 생겨났고 또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갈전리(葛田里)

본래부터 풍산현 지역으로 갈대밭이 있었으므로 갈밭, 갈전(葛田), 가을전(加乙田)으로 불리었다.고종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풍서면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구역폐합(區域廢合)에 따라 풍남면 하회동과 예천군 위라면의 장기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갈전동이라 하였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천면에 편입되었다.

갈밭마을의 북쪽 마을은 여자지(女子池)의 안쪽이 된다하여 못안, 모산마을이라 한다. 이 모산 앞의 골짜기는 배암골이다. 갈밭의 북쪽 검무산 아래 지당마을이 있다. 옛날의 조그마한 못이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그 흔적으로 좁다란 지당못이 있다. 지당의 아래쪽엔 원댕이 원당(圓塘)마을이 있다. 원댕이 아래의 마을은 느다리라 부른다. 지당마을의 동쪽에 양뱅이, 양광(陽光)마을이 있다. 거산, 검무산(巨山,劍無山)의 양달쪽이 된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갈밭 오른편에 있는 들은 오른들이며 뒤편의 들은 진바리라 하고 서북쪽마을은 진주, 진내이라 부르고 진천 북쪽의 마을은 텃골, 기곡이다. 지금 현재는 여자지 못을 기준으로 갈전 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가곡리(佳谷里)

안동시내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나 구담으로 가는 길목에 가일이 있다. 본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일, 지곡촌(池谷村), 갈전리 일부와 풍남면의 하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가일과 지곡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가곡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70가구에 479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산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가곡리는 1리에 논동골, 가일, 도가걸, 시골 등 4개의 자연마을과 2리에 중리, 평장골, 선원, 못밑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로를 세운 안동 권씨 태사 행(幸)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후 지금까지 약 500년 동안 이들의 삶의 자취가 담겨진 안동 권씨 집성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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