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후니훈 - 리출신 안치훈의 고향,,,,ㅋㅋ
"기응상븍또 안덩씨 픙천미언 갈쩐이뤼 삼칠 쌈번쥐"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갈전 2리 373 번지"
안동시 풍천면 사진으로 더보기..(병상서원/하회마을) ▼
구석구석 병산서원1 => http://touralbum.tistory.com/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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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하회마을1 => http://touralbum.tistory.com/300 |
구석구석 하회마을2 => http://touralbum.tistory.com/301 |
연 혁
- 삼국시대 - 하지현(下枝縣)
- 고려시대 - 풍산현(豊山縣)
- 조선시대 - 풍남면(豊南面), 풍서면(豊西面)
- 1934. 4. 1. - 풍천면(豊川面)으로 행정구역 개편
- 1976. 7. 1. - 어담출장소(魚潭出張所) 설치 (5個里)
- 1995. 1. 1. - 안동시 풍천면(安東市 豊川面)
지역특성
- 풍천면은 지역적으로 안동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천,의성과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강이 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특히 하회마을, 병산서원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어느곳보다 문화에 대한 보존의지가 강하여 어느곳 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을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의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 또한, 참외, 메론, 수박, 곶감, 마등 특산물을 생산 전국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판매실적 또한 매번 늘고 있는 상태이다.
하회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별신굿 탈놀이에 사용되었다는 목조가면이 전한다. 이 탈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가면(木造假面)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때의 것이다. 지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이 탈에 대한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옛날 하회마을 동사 앞마당에는 부락민 모두가 모여 앉아 재미나는 놀이를 만들고자 여러 가지 의논이 분분 하였다.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양반, 선비, 초랭이, 영감, 부네, 이매, 백정, 할미, 주지 그리고 소(牛) 등으로 우선 결정하였다. 이때 총각 하나가 "아닙니다요! 얼마 전 윗마을에 중이 나타나 각씨를 업고 도망갔다는데 기왕지사 삐뚤어진 양반사회를 풍자하기로 했다면 중과 각씨 마당도 집어넣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찬성했다.
온 마을 사람들은 놀이를 꾸미는데 신바람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놀이는 당시 철저한 신분과 계급속에서 하동(아랫것)들이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표현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을 신랄하게 조소(嘲笑)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 얼굴로 춤을 추게 되면 누가 어떤 역할을 하고 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됨으로 춤추는 자도 꺼리게 되고 보는 사람도 흥이 없을 것이므로 탈을 만들어 쓰기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번을 서고 있는 손재주 좋은 허도령에게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허도령은 극구 사양했으나 꿈에 마을 수호신으로부터 탈 제작의 계시(啓示)를 받고 나서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허도령은 가을이 깊어갈 무렵 하회마을 뒷산 수목이 울창하고 한적한 곳에 외인의 출입을 막는 금색을 친 다음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전심 전력을 다 하여 열 두개의 탈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허도령은 탈을 다 만들려면 석달은 넘어야 할 터이니 모든 정성을 다해 훌륭한 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허도령이 이처럼 탈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을 때 마을 처녀들 사이에는 허도령이 종종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허도령이 탈을 제작하는 모습은 마치 신선 같다느니 아니면 뛰어난 귀공자를 닮았다는 등 처녀들은 은근히 그를 사모(思慕)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사모의 정이 넘친 한 처녀가 밤중에 홀로 일어나 뒤편의 은행나무 앞에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하루 빨리 허도령이 탈 만들기를 끝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그러기를 석 달되던 어느 날 떠놓은 정화수 속에 허도령의 모습이 보였다. 만들어 놓은 탈과 함께 영롱하게 허도령의 얼굴이 비쳤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탈을 다 만든 것이로구나 생각하니 그 처녀는 허도령이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처녀는 그만 참지 못해 허도령의 처소를 찾아갔다. 고고한 달빛은 처녀의 가슴을 더욱 애타게 하고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허도령은 탈 제작에 여념이 없다.마침 마지막 탈인 이매의 턱을 깎으려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은 과연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앉은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본 처녀는 연정을 누를 길 없어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도령님! 허도령님! 잠시 손을 멈추시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요. 네!" 허도령이 이매의 턱을 만들려다 말고 여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아니? 이 밤중에 웬 계집이? 밖에 뉘시오!" 하면서 안절부절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 졌는데 어쩐 일인가?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가 실족으로 벼랑 끝에 떨어져 그 또한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매탈>은 턱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하며 오늘날 하회탈춤에는 턱없는 이매가 등장하여 바보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보아 하회마을엔 오래전부터 허씨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래서 하회마을은 허써터전이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옛날 하회마을 낙동강 강가 오막살이집에 안씨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지나던 중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한다. 찢어질 듯이 가난하여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해 딱한 처지이었으나 마음씨 착한 안씨 내외는 스님을 거절할 수가 없어 재워주기로 허락했다.
그렇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스님을 굶길 수는 없었다. 이들 부부는 저녁거리 때문에 온갖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천장 갓집 옆에 매어 달아둔 명년 봄에 농사지을 피 종자를 꺼내어 저녁을 장만해 대접했다. 스님이 주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근심이 역력하였다. "여보! 주인장, 보아하니 걱정이라도 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이십니까?"고 물었더니 안씨는 작년 봄에 친상(親喪)을 당했지만 가난 때문에 묘자리를 구하길 없어 여태까지 아버님의 유택(묘)을 마련해 드리지 못하여 불효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스님은 안씨의 착한 마음과 공손한 대접에 감동하여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날이 밝자 스님은 "주인장! 어젯밤 이 댁에서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내가 묘터 하나를 잡아 드리지요" 하면서 자기를 따라 나서라고 한다.
안씨와 스님은 하회의 동쪽 화산(花山) 근처 산중턱을 올랐다. 어느 곳을 택한 스님은 "이 자리가 명당이긴 하오만……." 하는 것이다. 사연인즉 여기에 묘(墓)를 드리면 3대 후에 정승(政丞)이 난다는 말을 했다. 너무나 어려운 가난 때문에 지친 안씨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3대 후에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다는 곳을 마다하고 스님에게 부탁하여 현실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묘자리를 찾아달라고 하여 그곳에다가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말았다.
그 자리는 당년에 피 천 석을 거둘 수 있다는 명당이었다. 그리고 나서 안씨는 스님이 시켜준 대로 곡식 종자를 열심히 구하여 이른봄 하회의 낙동강 가에 뿌렸다. 시절이 좋아 그해 가을에 뿌린 곡식을 천석이나 수확하게 되어 그는 당년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써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향언(鄕言)이 생겨났고 또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본래부터 풍산현 지역으로 갈대밭이 있었으므로 갈밭, 갈전(葛田), 가을전(加乙田)으로 불리었다.고종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풍서면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구역폐합(區域廢合)에 따라 풍남면 하회동과 예천군 위라면의 장기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갈전동이라 하였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천면에 편입되었다.
갈밭마을의 북쪽 마을은 여자지(女子池)의 안쪽이 된다하여 못안, 모산마을이라 한다. 이 모산 앞의 골짜기는 배암골이다. 갈밭의 북쪽 검무산 아래 지당마을이 있다. 옛날의 조그마한 못이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그 흔적으로 좁다란 지당못이 있다. 지당의 아래쪽엔 원댕이 원당(圓塘)마을이 있다. 원댕이 아래의 마을은 느다리라 부른다. 지당마을의 동쪽에 양뱅이, 양광(陽光)마을이 있다. 거산, 검무산(巨山,劍無山)의 양달쪽이 된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갈밭 오른편에 있는 들은 오른들이며 뒤편의 들은 진바리라 하고 서북쪽마을은 진주, 진내이라 부르고 진천 북쪽의 마을은 텃골, 기곡이다. 지금 현재는 여자지 못을 기준으로 갈전 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안동시내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나 구담으로 가는 길목에 가일이 있다. 본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일, 지곡촌(池谷村), 갈전리 일부와 풍남면의 하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가일과 지곡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가곡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70가구에 479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산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가곡리는 1리에 논동골, 가일, 도가걸, 시골 등 4개의 자연마을과 2리에 중리, 평장골, 선원, 못밑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로를 세운 안동 권씨 태사 행(幸)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후 지금까지 약 500년 동안 이들의 삶의 자취가 담겨진 안동 권씨 집성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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